11월 1/2 단평

<초능력자>
- 강동원과 고수가 나온다는 사실만으로 나를 비롯한 여성관객들에게 호감을 살 영화. 호감도를 너무 믿었는지 연출은 엉망진창. 초인의 감정선은 살지 않은 채 단순한 '살인마'처럼 묘사되다보니 임대리도 단순한 '바보'가 되어버렸다. 마지막 장면은 올해 최악의 장면이라해도 무방할 정도로 허탈 그 자체. 일본만화를 너무 본 듯, 연출은 엉성한데 결론만 호방하게 튀긴다고 제대로 멋날리 없다. thumbs-down


<레터 투 줄리엣> 
- 올해 본 유일한 로코물. 이탈리아 줄리엣 동상에 구구절절 연애사를 고백하는 전세계 여성들에게 '답장'을 해주는 줄리엣 매니저가 있다, 그 매니저 노릇을 우연찮게 하게 된 미국 저널리스트 지망생이 "단 하루" 일했을 뿐인데 50년 묵은 편지를 찾아내 답장을 하고, 그 편지의 당사자가 50년만에 이탈리아로 첫사랑을 찾아온다는 믿거나말거나한 로맨틱한 설정. 지극히 상투적인데 마음을 울린 이유는, 아무래도 환경 탓. 각박한 도시생활을 하는 현대인에게는 해피엔딩이 역시나 필요하다.  thumbs-up




9-10월의 영화들 단평. review

1. <부당거래>
옥수수 줄테니 다이아몬드 달라 뻐렁치는 한국의 간디들에게 날리는 주먹세례. 호쾌한데 결말이 석연찮다.

2. <파라노말 액티비티 2> 
구구절절 설명은 그만. 공포란 추측할 때 가중되는 법. 왜 이래 아마추어면서 프로처럼. 

3. <죠스>
반공 이데올로기, 죠스,... 시네마, 필름 아닌 어디까지나 '시네마'적인 쾌감. 

4. <옥희의 영화> 
잭다니엘 블루라벨 이상의 가치. 홍상수의 사랑스런, 동시에 누벨바그스런 에피소딕 '필름'. 

5. <시라노: 연애조작단> 
상투적인 멜로의 상투적 대사가 주는 씁쓸함. 여자라고 다 다음번 여자를 의식하진 않지만.
 
6. <엉클 분미>
브라보, 아피피핏차차차차퐁브라보보보. 소통을 위한 소통의 가능성은 예술 본연의 가치에서 나오리라. 쉴러의 교훈을 새삼 실감. 고마워요, 정성일 프로그래머. 

7. <김복남 살인사건> 
여자라서 죄송합니다. 

 
하아... 


 


대릴 존스의 『Horror: A Thematic Vampires』: 인트로 vice versa

“글쎄, 모르겠어. - 내 추측엔 여기선 우리 모두 고체가(solid) 되는 거 같아.” 그 신사는 답하면서, 천천히 그를 돌아보며, 사려 깊은 웃음을 지으면서, 그의 입이 이상하게 보일 정도로, 그 웃음은 두 개의 주름을 만들어, 박쥐가 날갯짓을 하는 양, 그 어떤 쪽이 아니더라도, 매우 긴, 한 쌍의, 식인종의 이를 드러내었다.(제임스 1966: 41)

 

이런 이미지는 친숙한 것이다. 헨리 제임스의 1998년 소설, <보스턴인 The Vostonians>의 인용구에서, ‘그 신사’, ‘그 최면술사’ 새라 테런트의 정체는 뱀파이어임에 틀림없다. 작가는 테런트가 뱀파이어라는 사실을 수식어구를 통해 은유적으로 밝히고 있다. 물론, 그가 우리에게 “테렌트는 문자 그대로 뱀파이어”라고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소설 속 테런트는 낮시간 동안 목관에서 흙을 덮고 잠들지 않는다. 베레나의 빈혈증이 진짜 그가 그녀를 물어서 생긴 것도 아니다. 거듭 말해, 이 책에서 뱀파이어리즘 Vampirism은 은유적으로 사용된 것이다. 착취적 가족성과 상업적 관계를 상징하는 ‘메타포’로 말이다. 테렌트 역시 뱀파이어 같을(vampire-like) 뿐.

헨리 제임스는 생전에 미신적 소재들을 많이 다뤘다. (<The Turn of Screw>, <Aspern Papers> <The Real Thing>, <The Sacred Fount> 등등의 소설에서 확인 가능.) 그의 이러한 작품 성향은 제임스 B. 트윗첼(James B. Twitchell)의 19세기 뱀파이어 문학(<The Living Dead>)을 연구하면서 생긴 것으로 알려졌다.


트윗첼은 책 <The Living Dead>을 통해서 19세기 문학(예를 들면 '늙은 수부의 노래 The Rime of the Ancient Mariner'
과 같은 시)을 뱀파이어 전설의 기원으로 해석하는 등 뱀파이어리즘을 재치 있게 해석낸 바 있다. 그러나 이 책은 그 독창성에도 불구, 약점을 지니고 있다. 작가가 어떤 텍스트에서건 “피를 주고받기만 하면 the interchange of energe" 뱀파이어로 간주하는 우를 저질렀기 때문이다. 내가 보기엔 수사적 형태마저도 그는 뱀파이어를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우리가 ‘뱀파이어리즘’을 다룰 때 주의해야할 점은 뱀파이어가 꼭 문학에서의 ‘은유’나 ‘상징(체)’로 사용되어온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뱀파이어의 어떤 부분들은 상징적 유연성과 적용성을 지니고, 시대에 따라 상황에 따라 다른 의미를 지녀왔다. 뱀파이어는 1) 질병, 페스트, (질병의) 침범의 상징처럼 여겨지기도 했고, 2) 식민주의나 국가주의의 상징으로 다뤄지기도 했으며(뱀파이어와 국가주의자들은 “피와 흙 blood and soil"이라는 수사학, 같은 언어를 사용하고 있지 않나), 3) 프로이드 식으로 독해하면, 젠더-관계, 섹슈얼리티, 성의 억압을 의미하는 상징이 되기도 하였다. 4) 또한 뱀파이어는 때때로 계급관계를 의미하며, 귀족정치의 구현으로 보이기도 하였다. 유명한 맑스, 뱀파이어리즘을 자본주의의 “피를 빠는 bloodsucking” 과정으로 비유하기도 하였다. 일반적으로도 뱀파이어는 어떤 착취적인 인간관계를 의미한다.


주지하다시피, 헨리 제임스의 소설은 일련의 친숙한 이미지들을 이용하여 테넌트를 뱀파이어인 양 묘사하고 있다. 송곳니, 박쥐날개, 혹은 망투(인용구에서는 ‘waterproof') 등의, 제임스 독자들로부터 지금 우리 모두가 친숙한 그런 이미지들을 사용해서 말이다. 놀라운 사실은 이러한 이미지들이
브램 스토커의 <드라큘라>(1897) 소설에 등장하는 카운트 드라큘라(Count Dracula, 소설 속 뱀파이어 캐릭터 이름)를 자연스럽게 연상시키는데, 실제 제임스의 소설 <보스턴인>(1886)은 스토커의 소설보다 11년이나 일찍 출간됐었다는 것이다.


실제 뱀파이어 메타포는 (브램 스토커의 <드라큘라>가 있기 전) 19세기, 혹은 더 일찍부터 존재했던 뱀파이어소설들과 민간전승의 ‘라이브러리’를 위에 “구축되어왔던” 것이다. 일례로, “하나의 유령이 지금 유럽을 배회하고 있다”라는 인상 깊은 구절로 시작하는 맑스와 엥겔스의
<공산당선언>(1848)에도 뱀파이어는 등장한다. 이 선언에서 자본(Das Kapital)은 노동을 착취하는 뱀파이어로 묘사된다.

 

“자본은 죽은 노동, 마치 뱀파이어처럼, 살아있는 노동자의 피를 빨아댐으로써 생존하고, 생존할수록, 피를 더 빨아댄다” “노동일의 연장은 (중략) 오로지 노동자의 피를 빨아대는 뱀파이어의 갈증을 조금 더 가시게 할 뿐이다”(맑스 1983: 203)

 

착취적인 계급 관계를 묘사하며, 맑스는 자본, 혹은 자본가를 '루마니아 봉건귀족 최상층 Wallachian Boyar’, '뱀파이어 리더 지도자 Vlad the Impaler’ 로 묘사한다. 이는 당시 뱀파이어에 대한 사회통념과 무관하지 않다. 1932년 즈음, 한 남성잡지에는 동유럽 안에서 뱀파이어 담론이 유행이 번지는 것을 보도하는 통신원글이 실린 바 있다.

 

... 동유럽에서부터 유래한 뱀파이어는... 알레고리컬한 스타일 Allegorical Style 로 언제나 유명하다. 헝가리의 주들은 터키와 독일에 복종하고 있는데, 그들의 불평을 감추고 복종하라 하는 나쁜 손에 의해 다뤄지고 있다. 뱀파이어들은 살아있는 사람들의 피를 빨아댐으로써 그들을 죽인다고 알려져 있다. 탐욕스러운 총리 ravenous Minister는 거머리, 흡혈귀와 비교되고 있는 실정으로....

 

뱀파이어리즘을 묘사할 때 따르는 이런 ‘무게 있는(다양하여 무게감이 큰)’ 은유법 사용은 뱀파이어에 대한 ‘조리 있는(논리적인)’ 역사를 제공하기 힘들게 한다. (사람들이 사용한) 뱀파이어의 뜻은 너무나 다양했고, 너무나 본질적으로 달랐다. 니나 오에바흐(Nina Auerbach)가 지적한 것처럼, “뱀파이어들은 다른 소수자와 마찬가지로, 아웃사이더처럼 보이지만, 그들 사이에 차이점들은 표면상의 유사성들보다 보다 많은 것을 이야기해준다.” 지금부터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은 ‘도어정책 door policy’을 작동시켜, 이런 비유적인 뱀파이어들보다는 “실재” 뱀파이어를 바라보는 것이다. 나는 뱀파이어들의 은유적인 뜻들을 해체하고(tease out), 그들의 송곳니가 내게 보여준 ‘이후’의 분석들을 제시하고자 한다.


<더 셀>의 터무니없는 것과 벌이는 그로테스크한 게임 vice versa




오늘날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그로테스크는 우스운 것과 기괴한 것이 서로 불가해하게 얽혀있고 또 전혀 다른 요소들이 뒤섞여서 이상하고 불쾌하며 뒤숭숭한 감정의 갈등을 만들어내는 것을 말한다. 이를 두고 카이제는 “그로테스크는 터무니없는 것과 벌이는 게임”이라고 정의한 바 있다(성례아, 2006, 80쪽). 부조리와 유희의 접점이 만들어내는 불쾌하면서도 쾌한 미학. 때문에 너무나 당연하게도, 태생적으로 그로테스크와 호러 영화는 비슷한 예술적 요소들을 공유한다. 그러나 샴쌍둥이의 기괴한 운명이 그러하듯, ‘쾌’와 ‘불쾌’의 균형 사이에서 기우뚱 걸음마를 하던 상당수의 ‘그로테스크-호러’ 영화는 - 특히나 대중성을 추구했던 경우, - 한 발짝, 걸음을 떼기도 전에 “미끄러져” 죽는 경우가 많았다. <더 셀>이 대표적인 예다.

“그로테스크(= 낯설고 터무니없는)”한 엉덩이 사이즈를 지닌 제니퍼 로페즈가 주연을 맡은 호러 영화 <더 셀>는 시뮬라시옹의 정수를 보여주는, 알고 보면 꽤 흥미로운 영화다. 각종 초현실주의 회화의 이미지를 빌려, “실재”라 믿겨지는 영상매체의 특권을 이용해 회화의 그것보다 더 생생한 (복제) 이미지의 과잉현실을 만들어내고자 한, (실제로도 만들어낸,) 그 사악하면서도 유치한 시도를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R.E.M의 "Roosing My Religion"으로 유명한 뮤직비디오 감독 출신의 탈셈 싱은 정신분열증 연쇄살인마(男)와 정신과의사(女)의 ‘꿈(실제로는 꿈이 아닌 기계로 연결된 무의식 세계에서의 만남이지만)’을 통한 만남, 그 소재의 진부함을 ‘그로테스크한 시각이미지의 활용’으로 탈피하고자 하였다. Odd Nerdrum, H.R. Giger, Demien Hirst 등의 회화, 조각 이미지를 적극적으로 ‘모방’한 것. 피터(FBI 요원)가 칼(연쇄살인마)의 무의식 세계로 처음 침투하는 장면은 Nerdrum의 “Dawn"에서, 캐서린(정신과의사)가 소년 칼과 처음 만나는 장면에 등장하는 유리 케이스 안에서 말이 잘려나가는 장면은 Hirstdmlk "Some Comfort Gainde from the Acceptance of the Inherent Lies in Everything"에서, 캐서린이 칼을 찾아 돌로 된 홀웨이를 달려가는 장면은 H.R. Giger의 "Schacht"의 이미지를 적극적으로 (영상으로) 재현한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모방’은 그로테스크 담론의 핵심이다. 그로테스크는 “일반적 세계에 뿌리”를 두나 동시에 “전적으로 다른 세계”를 그리는 것으로도 이해된다(백훈기, 104쪽) 그러한 양면성이 만들어내는 기괴하고 복합적인 감정이 그로테스크의 ‘불쾌의 쾌’ 미학을 이룬다. 때문에 대개의 그로테스크한 모방 방법에서는 현실적인 소재들이 사용된다. 그 현실적인 소재들은 그로테스크한 표현 속에서 왜곡되거나 과장되거나 일그러짐으로써 낯선 모습(소외 효과)를 가져온다. 다시 말해, 그로테스크의 모방 방식은 ‘단순 모방’이 아닌 ‘재구성된 모방’이어야 한다. <더 셀>의 그로테스크함은 여기에 있다. 개봉 당시 평론가들은 감독이 초현실주의적 이미지들을 무비판적으로 모방했다며 영화 속 그로테스크한 시각 이미지의 과잉이 내러티브를 ‘소외’시키는 문제점을 비판하였다. 그러나 사실 이러한 ‘소외’는 <더 셀>이 그로테스크할 수 있는 결정적 이유다. 연쇄살인마라는 현실적인 소재는, 무의식의 세계라는 영화적 장치를 통하여 기괴하게 어그러진다. <더 셀> 속의 연쇄살인마는 연쇄살인마 자신이 아닌 ‘스타거’라는 악마의 환생으로 인형으로 변한 살해된 처녀들의 자위행위와 말(자유)에 집착하는 소년과 엉덩이가 큰 만큼이나 (처녀임에도 불구하고) 모성애로 가득 찬 정신과 여의사의 교접을 즐긴다. 그의 세계에서 Nerdrum의 회화 속 뮤즈들은 외친다. “내 아이는 미쳤어요!” 회화에서는 멍청하게 입만 쩍 벌리고 구원을 갈망하던 그녀들은 영화라는 매체를 통해 목소리를 가지게되었다. 그러나 평론가들이 지적하듯이 그녀들의 목소리는 공허한 것으로, 어떠한 ‘그로테스크’한 분위기만을 만들어낼 뿐, 영화의 내러티브 통일감을 해치는 ‘불쾌한’ 장치로만 기능한다. 초현실주의 회화의 이미지의 ‘쾌’가 영화의 내러티브와 만나 만들어내는 ‘불쾌’는 영화 곳곳에서 발견되는 것으로, 결과적으로 관객을 “미끄러지게” 한다.


Kristen A. Hoving가 ‘Convulsive bodies'에서 그로테스크와 초현실주의의 관계를 언급하며, 그로테스크의 개념을 “미끄러지는” 것이라 정의했던 것을 상기해보자. 진흙 형체처럼, 손으로 잡기 어렵고 한쪽으로 미끄러져나가고, 또 다른 쪽으로 미끄러져 결국 꼭 잡은 손에 배어 스물스물 나오는 그로테스크는 그동안 많은 글들이 쓰였음에도 여전히 정의내리기 힘들다. Hoving 말마따나, 천성적으로 그로테스크는 “분명한 정체성을 지닌 것, 세계에 위치한 것, 이해할 수 있는 경계”의 반대편에 위치한다. 그것은 형태를 해체하고 아름다움, 이성, 조화에 흠집을 낸다. 그로테스크가 아닌 것으로부터 생명을 흡수해 기형적이고 불구이고, 초점이 없는, 뚜렷하지 않은, 분해된, 대조적인 것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더 셀>의 초점 없어 보이는, 뚜렷하지 않은 내러티브와 ‘단순 모방’으로 치부되었던 불구적인 시각 이미지의 과잉 문제는 감독이 ‘그로테스크 이미지’를 표방한 시점부터, 필연적으로 파생될 문제였다 할 수 있다.


관객에게서 ‘열린 해독’, 불균질한 텍스트가 용인되는 실험영화나 저예산의 마니아용 상업영화라면 모를까, 상업영화와 그로테스크의 교접은 역시나, 그로테스크할 수밖에 없다는 교훈을 남긴다.


- 참고문헌 -

 

성례아, 퀘이 형제의 애니메이션 <악어의 거리>에 나타난 그로테스크 성(性)에 관한 연구, 한국콘텐츠학회지, 79-87p.

백훈기, 모방의 관점에서 본 그로테스크의 기능과 의의, 종합예술과 음악학회지, 2권, 2호, 99-118p.

 


<심야의 FM> 영화광의 허무한 엔딩 review

'광'으로 끝난다하여 영화광이라면 어딘가 모르게 'geek'스러울 것이 틀림없다는 편견에서 출발하는 영화,
또 그 편견에서 멈춘 영화. <심야의 FM>은 <올드보이> 이후 이렇다할 존재감 있는 연기를 보여주지 못하고 있는 유지태의 신작이다. 극중 유지태가 연기하는 '한동수'는 영화제목이 명명백백하게 가리키듯 심야의 라이오 프로그램에 깊이 '광'한 인물. 영화음악을 다루는 라디오 프로그램의 DJ인 아나운서가 하는 말 한 톨 한 톨 진지하게 주워담아 삶의 지령처럼 떠받들며 직접 행동으로 실천한다. 하필 그 아나운서가 사회정의감에 불타오르는 인물이라, 그는 <택시드라이버> 로버트 드니로를 모델 삼아 직접 사회악을 처단하기 위해 살인을 단행하기에 이르는데, 유명 고전영화를 오마주하거나 모방하는 대부분의 '미메시스'물의 숙명처럼, 그 캐릭터의 논리성은 시간이 갈수록 허무하게 떨어지고 만다. 감독의 애초 의도는 한동수라는 인물을 일종의 안티히어로, 악인이나 미워할 수 없는 사회악의 대리 처벌자 정도로 묘사하는 것이었을듯 한데, 안타깝게도, 유지태의 연기는 둘째 치고 그 안티히어로가 되는 배경이나 과정에 대한 논리적 설명이 부재하니 딱히 공감대가 형성되지 않는 것이다.

<무릎팍>에 나온 유지태가 영화 속 한동수 모습보다 차라리 더 영웅적이다. 지상파에서 다른 배우들이 차마 입에 담지조차 못하는 '성관계' 드립까지 치는 용감무쌍한 배우, 소신있는 한 남자 아니던가.

수애, 는 연기 잘 한다고 소문 난 배우인데 딱히 이 영화에서는 매력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싱글맘으로 장애를 앓고 있는 딸에게 느끼는 절절한 사랑만 솜씨 있게 표현할 뿐, 스릴러 영화 여주인공으로 필요할 지성적 매력, 하다못한 섹시미가 그닥 느껴지지 않으니, 모르겠다. 나란 관객이 쌈마이라 그럴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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